뭉툭할까, 구겨졌을까
동길산 시인이 쓰는 부산진이야기 (76)
한국신발관 수녀의 신발
한국신발관. 한국에서 유일한 신발 랜드마크다. 신발산업의 미래를 열어가는 창조의 공간이면서 신발 문화를 접하는 공유의 공간이다. 한국 신발이 세계 챔피언이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았으며 이제는 세계의 문화(K-Culture)가 된 한국 신발을 담았다. 부산진구 개금동에 있다.
한국신발관은 7층 건물. 대부분 층은 전문가 양성이나 기업지원 용도로 쓰는 창조의 공간이다. 접근이 용이한 1층과 2층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유의 공간으로 쓴다. 1층은 멀티홍보관, 2층은 역사전시관이다. 멀티홍보관도 그렇고 역사전시관도 그렇고 언제 가 봐도 아이와 엄마가 보이고 언제 가 봐도 유아들과 인솔 교사가 보인다.
2층 전시관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역사관과 유명인 신발코너다. 역사관은 그 옛날 고구려부터 시작해 1980년대 세계 챔피언에 이르기까지 한국 신발의 위상을 보여준다. 그때 그 시절 고무신은 보기만 해도 구수하다. 유명인 신발 코너는 현재 진행형이다. 유명 연예인, 스포츠 스타가 신었던 신발이 그들을 직접 대면하는 듯 반갑다.
"이해인 수녀님이 신발을 기증하셨습니다. 4월부터 전시할 예정입니다."
(기증할 신발을 가슴에 안은 이해인 수녀.)
곧 4월. 신발과 관련한 글을 연재하면서 알고 지내는 한국신발관 김민철 과장이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이해인 수녀의 신발 전시 소식이다. 이해인 수녀는 수녀로서 시인으로서 한국인의 마음을 어루만져 오신 분이다. 영화배우 이영애가 부산 오면 꼭 찾아뵙는다는 분이며 성악가수 조수미가 수시로 국제 전화하며 안부를 여쭙는다는 분이다.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는 애독자에게 바이블이 된 지 오래다.
이해인 수녀는 수녀원에서 지낸다. 광안리 바다 가까운 성베네딕도수녀원이 거기다. 거기 지내면서 마음을 어루만지는 시낭송회이며 강연을 나가며 부산 곳곳을 쓰다듬기도 한다. 그러면서 부산을 알았고 그러면서 부산 사랑을 키웠다. 안타까운 장면도 더러 봤다. 신발회사가 1990년대 들어 줄줄이 문 닫을 때는 특히 안타까웠다.
"부산에서 지내면서 신발에 대한 애정이 컸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일자리였으니 고맙기도 했고요. 그 당시 방송이나 신문에서 신발 어렵단 얘기를 들을 때는 기도 많이 했습니다. 신발 시 낭송을 하면서요."
애틋한 마음. 신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수녀원 수녀님을 한국신발관으로 이끌었다. 올해 2월 11일이었다. 사상구 강연 예정지를 방문했다가 수녀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개금동 한국신발관을 방문했다. 다시 높아지고 다시 깊어지는 한국의 신발을 둘러보는 내내 흐뭇하고 감사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부산진구 개금동 한국신발관을 둘러보는 이해인 수녀.)
신발 기증 이야기는 그때 나왔다. 2층 유명인 신발 코너를 둘러볼 때였다. 이해인 수녀는 흔쾌히 응했고 3월이 가기 전 평소 신는 두 켤레를 기증했다. 고무신과 실내화였다. 꽃무늬 화사한 검정 고무신에 시를 담아서였다. 왼짝, 오른짝 각각의 짝에 한 편씩 두 편이었다. 그중 하나다.
내가 신고 다니는 신발의 다른 이름은 그리움 1호다
나의 은밀한 슬픔과 기쁨과 부끄러움을
모두 알아버린 신발을 꿈속에서도 찾아 헤매다 보면
반가운 한숨 소리가 들린다/나를 부르는 기침 소리가 들린다
신발을 신는 것은 삶을 신는 것이겠지
나보다 먼저 저세상으로 건너간 내 친구는
얼마나 신발이 신고 싶을까
살아서 다시 신는 나의 신발은
오늘도 희망을 재촉한다
-이해인 시 '신발의 이름'
(이해인 수녀가 기증한 꽃고무신과 시 엽서. 이해인 수녀는 수녀로서 시인으로서 한국인의 마음을 어루만져 오신 분이다.)
이해인 수녀가 병상에서 썼다는 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그때. 수녀이자 시인은 신발을 봤고 희망을 봤다. 당신은 어떤가. 아픈가, 안 아픈가. 사람은 그렇다. 아프기도 하며 안 아프기도 하며 다들 각자의 길을 간다. 각자의 길을 함께 가는 동반자가 신발이다. 평생을 수녀로서 시인으로서 지내는 분과 동반한 신발은 어떨까. 뭉툭할까, 구겨졌을까. 4월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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