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 한 코 한 코 뜨개질하듯
김정애 동화작가
뜨개질로 편물 완성하기'는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아있던 숙제였다.
여고 1학년 때였는지 2학년 때였는지, 바자회가 있었다. 여름 방학 동안 뜨개질을 해서 바자회 물품으로 제출하기가 모두에게 숙제로 주어졌다. 방학이 끝나자 어떻게들 완성했는지 빠짐없이 뜨개질 물품들을 제출하였다. 바자회 전날, 교실마다 시화 패널, 그림 따위들이 걸리고 또 다른 교실에는 뜨개질 물품들이 넘치게 진열되었다.
중학교 때는 바느질과 수놓기를 배웠다. 수업 시간에 이론뿐만 아니라 실기도 충실히 했다. 고등학교 때는 실기가 생략되었다. 입시를 앞둔 학생들이 이론만 알면 되지, 실기가 뭐 필요 있냐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니 편물 과제 제출은 모두가 뚝딱 해낼 만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안뜨기, 겉뜨기, 고무뜨기 같은 대바늘 기호와 짧은뜨기, 긴뜨기, 방울뜨기 같은 코바늘 기호를 읽을 수 있었고 기초 뜨기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숙제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코바늘로 구멍 숭숭 뚫린 여름 조끼를 떠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용감하게 코를 잡고 뜨기 시작했는데 몇 단을 뜨지 않아서 숙제를 완수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팔이 들어가는 부분, 목이 들어가는 부분에서 코 줄이고 늘이는 방법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자 한 단 한 단 떠올라가는 일이 몹시도 힘겨웠다. 이렇게 해봐야 마침내 난관에 부딪힐 거고, 난관을 끝내 해결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무거운 먹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결국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던 여름 조끼는 실물이 되지 못했다. 여고생이 해내기에는 지나치게 지루한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제출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읍내 뜨개방에서 조끼를 사서 제출하는 것이었다. 바자회를 위한 숙제여서 성적과는 무관했고, 바자회에서 모인 성금이 어디에 전달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 없었다. 따져보면 무슨 용도인지 모르는 기금 마련에 학생들이 이용된 셈이었는지도 모를 일인데, 나에게는 숙제를 편법으로 해결했다는 유쾌하지 못한 느낌만 남았다. 이 느낌은 희미해졌다가도 문득 또렷해지면서 해결하지 못한 숙제로 각인되어 버렸다.
최근에 엇비슷한 나이의 지인에게 바자회 경험담을 들었다. 그 사람에게도 편물 뜨기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과제였다고 한다.
그의 해결 방법은, 엄마가 대신해주는 것이었다. 아! 나만 못한 게 아니었구나. 그럼 그렇지.
그때 해내지 못한 숙제를 언젠가는 해결하고 싶었다. 가느다란 선에 불과한 실이 2차원의 면이 되고 3차원의 입체가 되는 그 처음과 끝을 경험하고 싶었다. 건너뜀 없이 한 코 한 코 떠나가야 하는 그 성실함을 실감하고 싶었다. 그걸 해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힘 하나를 더 얻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숙제를 드디어 해냈다.
난생처음 대바늘로 가느다란 목도리 하나를 떴다. 뜨는 동안 오만가지 깨달음을 얻는 기분이었다. 시작이 가장 어렵다는 것, 머리로 아는 게 진짜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힘으로 해야 한다는 것, 힘을 너무 주면 어깨에 무리가 온다는 것, 힘을 빼야 편물이 부드럽다는 것, 틀렸을 때는 과감하게 풀어서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 풀기 아까워 틀린 것을 두고 가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된다는 것, 한 번에 끝내려고 하면 몸이 힘들다는 것, 찔끔찔끔 뜨면 편물이 고르지 않다는 것 등등.
두 번째 대바늘 목도리를 뜨면서도 이것저것 생각이 많았다. 원하는 것을 뜨려면 그에 맞는 실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 뜨는 방법을 아는 것만큼 틀렸을 때 바로잡는 법도 알아야 한다는 것, 능숙해지면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볼 용기가 생긴다는 것 등등.
내친김에 코바늘 목도리도 떠보았다.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도구가 다르면 표현 기법도 다르고 편물의 성격도 달라진다는 것, 뜨개질은 글쓰기와 많은 점에서 비슷하고 살아가는 것과도 많이 닮았다는 것 등등.
2023년이다. 오롯이 주어진 새로운 1년이다. 새해라고 좋은 일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들려오는 소식들도 가볍지 않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 가족과 지인들의 안부가 앞서고, 심각한 기후 문제가 뒤따라온다. 그 뒤를 사회, 경제, 국제 문제들이 줄줄이 따라온다.
그래도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고 싶다. 웃을 일에 웃고, 화낼 일에 화내고, 슬플 일에 슬퍼하고, 나눌 일에 힘써 나누며 살아가고 싶다. 한 코 한 코 뜨개질하듯이, 서두르다 빼먹지도 말고 빡빡하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내고 싶다. 그렇게 살아내는 하루하루가 연말이 되면 도톰한 목도리, 폭신한 스웨터로 완성될 거라고 믿고 싶다. 스스로 지은 복이 되어 푸근하고 따뜻하게 우리를 감싸 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아니, 믿는다.
부산진구 주민들께서도 좋은 한 해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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